가라타니 고진의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을 읽고..

2021. 8. 30. 19:36"사회를 바라보는 눈"/"BOOK&REPORT"

 

이 책을 여러 번 반복해 읽으면서도 정말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고, 솔직하게 아직도 고진이 무엇을 이야기 하려는지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고진이 그 자체로 어려운 맑스의 이론에 다양한 학문을 연계하여 설명한 부분이 생소할뿐더러, 책의 기본 주제인 자본론 또한 내가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이유는 맑스의 이론에 대한 이해도 중요하겠지만, 단순 관찰과 사유의 차이 또 그것에서 파생되는 효과로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혹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을 가지며 당연전제의 당위성에 대한 사유를 통해 은폐 혹은 차이를 발견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지하며 이 과정을 거쳐 대상에 대한 근본적 이해를 통해 비판이든지 이해라든지 다음으로 나아가는 프로세스에 대한 필요성을 깨우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의 경제현상을 맑스의 틀 안에서 모두 설명하는 것은 당연 어폐가 존재한다. 맑스의 이론 뿐 아니라 어떠한 단일 이론으로 현재 자본주의에 대한 온전한 설명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새로운 경제학 이론이 등장하고 기존의 존재하던 경제학 이론들이 설명하지 못하던 부분을 합집합적인 구조로 설명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부분은 맑스 이론의 적용성이나 타당성 보다는 그가 자본주의를 바라본 방식에 주목하려 한다. 또한 어떠한 경제 현상에서 은폐와 차이를 발견하고 이로 파생되는 문제점을 통찰하였다고 함에도 해결책에 적용하는 무의식적인 이론적 신봉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더 깊은 사유와 숙고의 필요성은 더 가중된다고 생각한다. 맑스주의(자신들의 정당성을 위해 악용한 부분이 있지만)를 경제체제로 선택한 나라는 현재로선 실패한 평가를 받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의 치부이나, 대한민국 자본주의에 문제점을 제시하며 대기업의 분배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한 한 인물의 이론적 신봉을 가져, 그가 대한민국 자본주의에 해결책으로 제시한 한 정책에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드렸으나 이 정책이 현재로서는 실패하였고 우리 세대에 커다란 눈덩이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이번 책에서의 나의 생각도 해결책까지는 확장하지 않고 맑스나 고진이 가진 논의 자체에 집중해서 논리와 서술방식에 근거하여 이 글을 읽기위해 노력하였다. 이것이 고진이 추구한 궁극적인 가능성의 중심이라 생각하였다.

 

자본론의 가치형태론에 집중한 고진은 맑스가 자본주의에 대한 고찰을 시작할 때 상품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한 점에 탁월함을 표현한다. 상품은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우나 논의에 대한 필요성에 의문이 들고 또 논의를 하지 않고도 합의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맑스는 이에 대한 의구심을 통해 기괴한 성질을 찾아내었고 이 초월적인 관념형태를 시발점으로 자본주의의 이해와 차이를 탐구한다. 맑스의 이론에 따르면 자본주의에서의 부()는 가치이며 이는 상품의 형태로 나타난다. 앞서 설명했듯 지금의 부()에는 부합한다고 보기 힘들지만 19c에 그가 바라본 자본주의와 이를 체제로 여기는 사회에서는 이러한 형태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존재 할 것이다. 결국 저 전제에서 상품은 가치가 나타나는 형태라는 전제가 파생된다. 이를 고전 경제학 관점에서는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구분 되는데 그 중 교환가치는 어떠한 관계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예로 쌀 한 말은 사과 2개로 교환 가능하다고 하면 쌀과 사과 질적 특성, 또한 한 말과 두 개와 같이 양적 특성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공통의 무언가를 통해 위 등식이 성립한다. 이 공통의 무언가에 대한 포맷이 고전경제학에서는 노동가치설로 귀결된다. 허나 맑스는 이 동일성을 형성하고 초월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이 포맷에 대한 의심을 통해 체계와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탐구를 하고 이질적인 것을 동질적으로 만드는 차이를 발견한다. 노동의 구분을 통해 노동가치설로 귀결되는 이 현상에 의문점을 제시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노동에 대한 산술평균의 과정을 거쳐 구해지는 전형성이라는 특성에 작년에 수강한 전공과 상충되는 이견이 있어 공유하고자 한다. 경영대 재무관리의 한 교수님은 가치 있는 사람이 되라며 이 가치는 한 개인이 미래에 창출가능한 기대되는 모든 현금흐름의 현가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라라는 말씀이셨는데, 맑스가 재무관리 수업을 함께 했더라면 교수님이 제안하는 가치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을까? 의문점이 생겼다.

 

다음으로 화폐형태가 가치형태론을 은폐한다는 주장을 맑스는 제시하였다. 이 전제는 가치형태가 사회적 추상노동의 관계로 표현된다는 것을 토대로 논의를 이어간다. 예로 위에서 교환가치를 설명한 것과 같이 YA=XB라는 등식이 성립된다고 가정하자. 더나아가 YA=XB,UG,WD,IR도 성립한다고 가정하자. 등식이니 좌,우변을 바꾸어서 XB,UG,WD,IR= YA와 같은 형태로 나태내면 YA와 같은 것의 속성을 화폐와 같이 표상권력과 대표권력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자본주의 사회는 일반적 가치형태가 내재된 교환관계라는 전제를 임의적으로 상품이란 가치를 인정받는 사물로 치환함으로 전도와 은폐성이 자연히 내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음으로 자본주의란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를 뜻하는데 여기서 자본은 자기증식하여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전공시간에 배운바로는 화폐의 시간적 가치를 고려하면 자본이 표면적으로 자가증식을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맑스는 앞서 설명한 노동의 구분을 통해 자본주의에서 자본에 대한 고찰을 진행한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구매하고 생산물(상품)의 매뉴팩쳐를 통해 가치창출을 이끌어낸다. 여기서 노동력의 교환과정을 통해 잉여가치를 창출해나가는 과정을 탐색하는데, 여기서 나는 의문점이 들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노동력을 구매하고 파는 것이 과연 교환이라는 범주에 포함이 될 수 있을까? 교환이라고 한들 공정함이라는 속성을 내포가능할까? 한 발 더 나아가 왜 칼 맑스도, 고전경제학자들도 인간을 노동력이라는 범주에 한정하여 경제시스템에 계속 집어넣는데 이것이 맞는것인지 의문점이 생겼다. 여기서 맞다 틀리다의 질문은 도덕적으로도, 또한 경제학적으로도 의문점을 내포한다. 인간이 지배해야하는 경제시스템에 인간이 종속되어 하나의 부품처럼 계산에서의 한 변수로서의 역할을 하다 보니 당연히 인간성이라는 근본적 가치가 자본주의에서도 또한 맑스주의에서도 흔들리는 것이지 않을까? 고민을 해보았다. 인간을 노동력이라는 지표안에 한정시키는 것은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등식임에도 우리가 모든 사회를 당연시 경제에 편입시킴으로 인간의 사회적 가치를 노동력이라는 범주에 한정시켜 표현 할 수 밖에 없는 오류를 자본주의자들과 맑스 그리고 고진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점이 남았다.

 

앞서 설명하였듯 맑스의 이론에 대한 고찰은 해결책으로 또한 현재 사회의 적용으로 나아가지는 않으려한다. 단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의 구성이 과연 당연한가? 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관찰되는 경제현상들이 당연한 것인가 한번쯤 질문을 던져보고 사유하는 것에 필요성에 대한 고찰의 기회가 되었다. 이러한 자본주의, 경제현상에도 모순과 은폐된 곳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하고 근본적 탐구를 통해 보다 나은 우리 사회와 자본주의를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 산업혁명 당시 인클로져 운동에 맞선 반종획운동이 그 결과와는 관계없이 보다 그 사유의 과정으로도 충분히 너무나도 빠르게 진보하던 사회에 브레이크를 걸고 나은 사회를 구성하는 것에 영향을 끼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