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득공의 "발해고" 서술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2021. 4. 26. 12:30"사회를 바라보는 눈"/"BOOK&REPORT"

개요

 

조선 정조 때 규장각검서로 일하던 실학자 유득공은 남북국시대 국가인 발해에 관한 체계적인 역사서가 없음에 대해 매우 아쉬워했다. 이에 그는 조선과 중국 및 일본의 역사서 24종을 참고하여 직접 발해에 관한 저술서를 펴냈다. 1784년에 1권본을 완성했고, 나중에 내용을 대폭 수정 보완하여 4권본을 완성했다. 1권본은 독립된 책으로 되어 있으나, 나중에 펴낸 4권본은 <영재서종>에 함께 수록되어 있다.

또한 <발해고>는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으로 부른 최초의 역사서로, 발해 전문 역사서로서 갖는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저자 유득공

 

유득공은 1748년에 태어나 1807년에 타계한 조선 후기 실학자이다. 1774년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인정되어 1779년 규장각검서로 들어갔는데, 여러모로 활약이 컸다. 15년에 이르는 검서관 생활 외에도 지방관을 역임한 것 또한 그의 중요한 이력 중의 하나이다.

 

37세 때인 1784년에 포천현감을 시작으로 지방관 생활을 하였는데, 그의 대표작인 <발해고>는 이 무렵에 저술된 것이다. 규장각에서의 연구 활동이 이 책을 저술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양근군수(지금의 양평군수)로 옮겼다가 42세의 나이에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와 광흥창 주무로 있었고, 다시 이듬해 5월에는 사도시 주부로 자리를 옮겼다.

 

풍천부사로 부임하던 무렵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유득공은 1801년에 풍천부사에서 물러난 뒤 칩거하며 저술에만 몰두했다. 60세였던 180791일에 세상을 떠나 성해응이 은거하던 포천 향산에서 남쪽으로 20리 떨어진 양주 송산 지역에 묻혔다. 또한 그는 장남 본학과 차남 본예 등 22녀를 두었으며, 두 아들 모두 규장각 검서관을 역임했다.

 

<발해고>의 내용과 구성 요소

 

이 책은 발해를 우리 역사로 체계화한 유득공이 최후까지도 수정한 <발해고> 4권본의 국내 최초 번역본이다. 발해를 한민족의 역사로 규정하고, 이를 체계화한 유득공의 <말해고> 4권본을 최초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4권본은 기존에 알려진 1권본과는 여러모로 차이점이 있다. 1권본에서 9개였던 목차는 4권본에서 5개로 개편되었고, 3분의 1 이상의 내용이 새로 추가되었으며(4권본의 분량이 1권보다 38.2% 더 많음), 1권본에서 드러난 오탈자가 수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유득공의 개인적 논평도 대폭 추가되어 그의 발해사 인식 또한 한층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1권본에서는 유득공 본인과 실학자 박제가의 서문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유득공은 이를 4권본에서 과감하게 생략해버렸다. 원래의 서문에서, 유득공은 '남북국 관계'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했다는 기존의 '통일 신라' 관념에 대해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발해 역사에 대한 정보가 아직 미흡하다는 점을 이유로, 그는 '남북국'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보류하겠다는 의미에서 서문을 삭제해 없앴다.

 

내 친구 류혜풍(유득공)은 박식하고 시를 잘 지으며 과거의 일도 상세히 알고 있으므로... (중략)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고려 왕씨가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는 것이니, 왕씨가 옛 땅을 회복하지 못함으로써 계림과 낙랑의 터전이 마침내 애매모호해지고 스스로 천하와 단절되어 버렸던 것이다.

(하략, 박제가의 서문 )

 

고려가 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중략) 이것이 남북국이라 부르는 것으로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

(하략, 유득공의 서문 )

 

첫 번째 목차인 '군주고'에서는 진국공부터 흥요주에 이르기까지 발해를 통치했던 17명의 왕(진국공, 고왕, 무왕, 문왕, 폐왕, 성왕, 강왕, 정왕, 희왕, 간왕, 선왕, 이진왕, 건황왕, 현석왕, 인선왕, 염부왕, 흥요주)에 중점을 두고, 각각의 삶과 통치 방식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예를 들어오늘날 발해 역사를 대표하는 왕 중 하나로 알려진 바 있는 성왕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성왕의 이름은 대화여이며 대굉림의 아들이다. 국인들이 원의를 시해한 뒤에 옹립했다. 왕은 연호를 중흥으로 바꾸고 상경으로 환도했다.

(본문 p.50)

 

두 번째 목차인 '신하고'에서는 발해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신하 112인(대문예, 대야발, 임아상, 대상청, 대능신, 대예, 대명준, 고원고, 대원겸 등)에 대한 설명이 실려 있다. 성왕의 아버지인 대광림 역시 속해 있다. 연관성이 있는 인물이 대부분 서너 명씩 묶여서 설명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한편 1권본에서 '신하고'84개의 소제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에 비해 4권본의 '신하고'112개의 소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만큼 내용이 확대된 것이다. 새로이 추가된 신하들로는 양성구, 오소탁, 배정 등이 있다고 한다.

아래는 소제목 '고남용, 고다불' 부분에서, 신하 고남용에 대해 서술된 부분을 발췌해온 것이다.

 

고남용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그 나라에서는 홍려관에서 연회를 베풀거나

조집원에서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그쪽 사신인 숙미동인과 함께 귀국했다. 숙미동인은 국서가 관례에 어긋난다면서 그냥 두고 가버렸다.

(본문 p.106)

 

세 번째 목차인 '지리고'에서는 발해의 행정 구역 제도와 산천의 명칭, 발해와 신라의 국경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51562'로 알려져 있는 발해의 행정 제도에 대한 설명이 구체적으로 실려 있는데, 해당 제도가 설정된 배경부터 그 과정, 그리고 세부적인 내용까지 많은 내용이 실려 있다.

 

<당서>에서는 "발해 땅에는 51562주가 있다"고 했다. 옛 숙신족 땅이 상경이 되고 용천부라 불렸다. 이것은 용주, 호주, 발주 등 세 개 주를 거느렸다. 그 남쪽이 중경이

되고 현덕부라 불렸다. 이것은 노주, 현주, 철주, 탕주, 영주, 흥주 등 여섯 개 주를 거느렸다.

옛 예맥족 땅이 동경이 되고 용원부 또는 책성부라 불렸다.

(하략, 본문 p.127)

 

앞서 언급한 '군주고', '신하고', '지리고'는 각각 제1, 2, 3권에 하나씩 속해있었다. 그러나 유독 네 번째 목차와 다섯 번째 목차는 두 개가 함께 제4권 아래에 묶여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네 번째 목차인 '직관고'에서는 당시 발해에 있던 주요 관직을 문관직과 무관직으로 나누어 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또한 당시 발해의 관복 제도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우육사로서 지부, 예부, 신부가 있었다. 산하 관청으로 융부, 계부, 수부가 있었다. 경과 낭중은 좌육사의 경우와 같았다. 이로써 여섯 관청이 병렬되는 것이다.

(본문 p.188)

 

3질 이상은 자주색 옷을 입고 상아홀과 금어대를 갖췄다. 5질 이상은 붉은색 옷을

입고 상아홀과 은어대를 갖췄다. 6질과 7질은 연한 붉은색 옷을 입고 나무홀을

들었다. 8질은 녹색 옷을 입고 나무홀을 들었다.

(본문 p.190)

다섯 번째 목차인 예문고에서는 당나라 현종과 일본국 성무천황이 발해의 무왕, 문왕, 강왕과 주고받은 몇 개의 서한이 번역되어 담겨 있다. 당시 발해와 당, 일본의 외교 관계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 나라에서 보낸 선원들과 전에 포로 되었던 사람들이 갖고 온 표문을 많이

받아보니, 경이 정성을 다함이 미진한 데가 없다. 길이 이런 마음을 지키고 영원히

변방의 울타리가 되면 저절로 복을 얻게 될 것이며, 이보다 더한 일도 없을 것이다.

점점 더 쌀쌀해지고 있으니, 경과 관원들과 백성 이하가 모두 평안하기를 바란다.

(본문 p.193, 당나라 현종이 무왕에게 보낸 네 건의 서한 )

 

마지막 목차인 부록 '정안국고'에서는 발해가 거란에게 망한 뒤 발해 고토 서쪽 변경에 자리를 잡았던 '정안국'에 대한 이야기가 간략하게 실려 있다.

 

정안국은 본래 마한 종족이다. 거란에게 망한 뒤 서부 변경을 갖게 되었다.

송나라 태조 때인 개보 3, 그 임금 열만화가 여진 사신을 통해 표문을 올리고

갖옷을 바쳤다. 태종이 태평흥국 기간에 먼 지방을 공략할 목적으로 거란을 공격하고자

할 때 이 나라에 조서를 내려 협공의 형세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본문 p.211)

 

 

 

<발해고>에 담긴 역사학적 관점

 

유득공의 '발해고'는 왜 '발해사'가 아니라 '발해고'라는 이름이 지어졌을까? 이는 이 책이 아직 미완성이라는 것을 유득공이 강조하기 위해 고의로 붙인 이름으로, 발해사에 대한 심화 연구가 더 많이 필요함을 시사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발해고> 1권본 서문에서 '남북국 시대'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4권본에서는 그 서문 부분을 통째로 삭제했다. 발해 역사에 대한 연구가 아직 미흡한 단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확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일부러 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유득공의 태도 속에서, 역사 상대주의적 관점이 은연중에 드러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상대주의적 관점이란 절대적으로 타당한 진리는 없으므로 타당성은 선택된 기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모든 진리나 가치는 그 기준에 따라 상대적으로 정해진다는, 인식과 가치의 상대성을 말하는 입장으로, 자신의 생각만을 절대적이라고 여기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신념이나 견해를 존중하는 태도이다.

 

발해 역사에 대한 정보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을 조선 후기에, <발해고>에 실려 있는 만큼의 정보를 뽑아내어 정리한 것만으로도, 그는 발해에 대한 본인의 지식에 대해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역사가로서의 사명감을 잊지 않고, 발해 역사에 대해 자신이 정리한 정보마저도 턱없이 부족함을 반복해서 강조하며, 새로운 정보나 다른 정보에 의해 본인의 지식이 보충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피력하였다. 이를 사회학 용어로 '개방적 태도'라고 하는데, <발해고> 저술 과정에서 유득공이 보인 태도야말로 개방적 태도의 단적인 예가 된다고 할 수 있겠다.

 

'개방적 태도'의 구성 요소는 크게 네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상대주의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주장이 항상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상대주의).

다른 사람의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할 수 있다(관용성).

상황이 바뀌거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면 이를 수용한다(융통성).

잘못되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자신의 입장을 견지한다(적절한 신념).

Basic 고교생을 위한 사회 용어사전, 2006. 10. 30., ()신원문화사

 

이로써 유득공이 역사 상대주의적 관점을 구비하고 있는 역사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상대주의적 태도와 관점은 역사학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학과 인문학을 포괄하는 거의 모든 현대 학문의 연구에 있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바이다. 이런 면에서, 학문가로서 유득공이 구비하고 있는 이러한 태도는 200여 년이 지난 현대인의 시각에서 봐도 존경할 만하다고 할 수 있겠다.